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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rgb(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자 원패권(資源覇權)주의에 대한 걱정이 커지고 있다. 지난 3년간 유례없는 장기 고유가 시대가 지속되어 유가 70달러 시대가 고착되고 있다. 단기급등 후 원래 수준으로 되돌아간 과거와는 확연히 다르다. 여기에다 금(金), 동(銅), 철광석 등 광물자원 가격 역시 사상 최고 수준에 있다. 지난 3년간 대략 2배 이상 뛰었다. 문제는 이러한 시장변화의 논리를 학계에서도 제대로 해석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새로운 시장균형 달성수준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rgb(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rgb(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이 에 지금 분명한 것은 단기 차원보다 좀 더 긴 안목에서 구조적 차원의 이해가 필요하다는 점뿐이다. 그러나 지식정보사회에서 이 같은 현상은 당혹스럽기만 하다. 이미 끝난 대량생산-대량소비 산업화사회에서나 있을 법한 천연자원 제약사회가 예견되기 때문이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rgb(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rgb(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산 업화사회는 에너지를 매개로 천연자원 대량투입과 공산품 대량생산체제를 특징으로 한다. 자원가격의 안정, 가능하면 하향 안정은 생산의 경제성과 복지창출의 기반이었다. 그러나 기술혁신을 통한 단위 가격 인상이 가능한 공산품과는 달리 자연 상태의 천연자원 가격 인상은 제한적이었다. 이에 실질 천연자원 가격의 하락이 지속되는 속칭 '1차 산품(천연자원)-2차 산품(공산품)간의 불평등 교환체제'가 고착되었으며, 이것이 1950년대 자원민족주의 발현의 기반이 되었다. 그 후 교역자유화, 세계 경제의 글로벌화와 탈 이념화에 따라 자원민족주의는 종식되었다. 최근 천연자원시장 변화는 이러한 추세를 반전하려는 조짐이 러시아, 중동, 중남미 국가들에서 자원패권주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어 혼란을 주고 있다. 이는 불평등 교환체계를 개선을 통해 승자독식(勝者獨食)형 신자유주의적 세계 경제 패러다임 아래 강요되어온 상대적 빈곤탈피 노력일 수도 있다. 후진국은 영원히 세계 중심에 속하지 못한다는 속칭 '종속(從屬)이론'의 재현일 수도 있다. 이에 21세기 초반은 자원패권주의가 지속될 것이라는 일부(?)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이 지속될까? 장기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현 여건에서 주기적 시장급변, 즉 파동의 도래는 불가피하다는 논리에는 주목해야 한다. 에너지를 포함한 천연자원부문 기술혁신 지연으로 지식정보화사회에의 적응한계가 지금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선진국일수록 천연자원의 공익적 기능을 보장하는 정책체계가 미흡하여 궁극적 해결수단 시행이 지연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미국의 경우 정치권이 고에너지 투입 경제체제에 너무 깊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어 필요한 개혁이 쉽지 않다. 중국도 자원 다소비형 경제성장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rgb(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rgb(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이 러한 여건에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대책은 무엇인가? 바로 천연자원 문제의 본질에 충실한 원론적 접근을 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 내용은 △에너지 소비효율, 특히 수송부문 석유 소비효율 제고와 △기타 천연자원의 대체(代替) 소비구조 확대로 요약된다. 석유증산의 한계가 곧 온다는 '오일 피크' 이론에 너무 경도되어 있다. 이번 석유위기 원인은 원유 부족이 아니라 정유부분 투자 부진 등 석유산업 상-하류시스템의 불균형 발전에 의한 면이 더 크다. 수요조절을 포함한 적절한 상-하류대책 조화를 통해 향후 30년이 아니라 더 오랫동안 석유 안정 공급이 가능하다. 공급 확대보다 소비효율 향상이 보다 경제적이며, 지속가능하다는 것이 이론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천연가스 수급불안은 발전용 수요 등 불필요한 신규 수요의 증대와 청정석탄발전과 원자력발전이라는 훌륭한 가스 대체수단 활용이 늦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경쟁력을 도외시한 단순 물량 확보 차원에서 벗어나 새로운 에너지-자원 이용체계 구성전략을 모색해야 한다. 자원패권시대에 명확한 논리배경이 없는 뒤늦은 해외자원투자는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지 모르지만 경쟁력 확보는 항상 불명확하다. 이제부터라도 제한된 국내투자재원 배분전략의 효율성을 우선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자원절약형 경제체제의 과감한 도입, 기술혁신에 의한 한국형 수급구조 형성 등 자원빈국으로서 독특한 대응전략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 대외적 약점을 대내적 혁신체제 구축의 계기로 삼는다면 지금의 자원위기를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다. 건설수출, 중화학공업 육성 등 발상의 전환으로 지난 2차 석유위기를 극복한 우리의 저력을 다시 한번 발휘해야 한다. <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rgb(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컴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rgb(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컴바탕';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 매일경제 5월 26일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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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 작성자박성숙
- 작성일200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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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고 유가 시대의 후유증으로 ‘3골드’라는 용어가 화제다. ‘3골드’란 전통적 금에 더해 원유(블랙 골드)와 천연가스(블루 골드)를 추가한 것이다. 한마디로 원유와 천연가스 가격이 금값이라는 말이다. 지난 3년 동안 유례없는 장기 고가격 수준을 유지하는 원유가격은 현재 수준(배럴당 70달러)보다 조금 낮은 선에서 점차 안정될 가능성이 보이고 있다.<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rgb(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이 에 반해 천연가스 시장은 지난 1년 동안 뒤늦은 가격 급등세를 지속하고 있다. 특히 액화천연가스(LNG)를 중심으로 2010년 대 초반까지의 추가공급 능력이 소진되는 수급비상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중국·인도 등의 신규 수요와 미국·유럽연합의 추가 수요에 따른 것이다. 여기에다 인도네시아·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의 자원고갈과 설비증설 지연, 이란·러시아 등에서의 자원 민족주의 고조로 공급불안이 가중되고 있다. 따라서 지난 1년 사이 수요자 주도시장에서 공급자 주도시장으로의 급속한 구조전환이 진전됐다. 사실 천연가스 시장은 상대적으로 풍부한 부존 여건 덕에 석유시장보다 안정적이었다. 원유가격의 80% 수준에서 수요자 주도시장 행태를 보여왔다. 따라서 최근 가스 시장의 변화는 획기적인 것일 뿐아니라 장기 파급도가 큰 구조적인 것이다. 따라서 전체 에너지 소비의 13%를 액화천연가스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에 대한 영향이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rgb(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rgb(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불 행히도 우리는 이런 구조변화 과정에서 큰 시련을 겪고 있다. 국내 액화천연가스 장기계약 도입가격은, 2002년 4.3달러(100만 BTU당)에서 지난해에는 7.93달러로 갑절 가까이 올랐다. 그러나 지난해 중반 이후 악화된 물량 확보가 가격 오름세보다 더 큰 문제다. 당장 올해부터 년 200만톤 수준의 공급부족이 예상되며, 특별한 조처가 없다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질 수도 있다. 장기계약보다 최고 세 배나 비싼 현물시장 의존도가 높아지게 되면 그 결과는 국민 부담 가중으로 돌아온다.<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rgb(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rgb(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이 미 우리의 현물시장 의존도는 일본 등 경쟁국보다 높다. 왜 그런가? 한 마디로 세계시장 변화에 탄력적이지 못한 대응태세 때문이다. 세계 시장구조가 급변한 지난 2년을 제대로 결론도 못낸 국내 가스산업 구조조정 논란 등에 몰두하느라 허비하였다. 이 과정에서 에너지의 공익기능 약화, 선진국 구조조정 실패사례 간과 등 지나친 신자유주의적 논리의 만연을 방치하였다. 이는 적어도 에너지 부문에서는 어떤 논리보다 국익 보장이 우선이라는 자원패권 시대의 세계 추세와도 어긋나는 것이다.<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rgb(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rgb(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여 기에다 국내시장 자유화 추세에 따라, 한 에너지원의 수급불안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여 방지하는 위기관리형 수급체계까지 약화됐다. 예컨대 액화천연가스 수급비상을 전력산업이 막아주는 보완체계가 무너졌다. 지금 상태를 내버려두면 머잖아 천연가스 비상사태가 우려된다. 무엇보다 가스 확보 전략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가 시급하다. 만시지탄의 우려가 있지만, 국익 차원에서 물량확보 경쟁력을 키우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국익 차원에서 에너지를 확보하고자 국영회사를 앞세우는 프랑스, 중국 등 경쟁국의 사례를 원용해야 한다. 소비자 보호를 위해 필요하다면 가스산업 구조조정 방향도 재검토해야 한다.<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rgb(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컴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rgb(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컴바탕';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 한겨레신문 5월 26일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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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 작성자박성숙
- 작성일200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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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1968 년 노벨이 유언에서 언급하지 않은 새로운 노벨상을 추가되었다. 바로 스웨덴 중앙은행이 은행설립 300주년 기념사업으로 신설한 노벨경제학상이다. 노벨경제학상은 상의 명칭이나 상금을 제공하는 주체가 다르다. 다른 상들은 모두 Nobel Prize로 시작된다. 반면 노벨경제학상은 "알프레드 노벨을 기리는 스웨덴 은행의 경제학상"(The Bank of Sweden Prize in Economic Sciences in Memory of Alfred Nobel)이라고 긴 명칭을 가진다. 다른 노벨상은 상금이 노벨 재단으로부터 나오지만 경제학상만은 스웨덴 은행이 직접 부담한다. 노벨 가(家) 사람들 중 일부는 노벨경제학상이라는 명칭을 빼주기를 요구하고 있다. 노벨의 유언과는 직접적 관련도 적으며 노벨이 생존시에도 경제나 경영을 싫어했고 부유한 사업가가 아니라 과학자, 발명가로 인식되길 희망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노 벨경제학상은 출신 배경만 빼고는 다른 노벨상과 동일하다. 기여한 바의 독창성, 과학과 실용상의 중요성과 영향도가 주요 선발 기준이다. 특히 2005년 노벨경제학상 선정위원장이었던 아사 린드벡(Assar Lindbeck)도 지적했듯이 "내가 다른 사람보다 멀리 보았다면 그것은 내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뉴턴의 명언이 그대로 적용된다. 즉, 후학들이 높은 경지로 올라갈 수 있도록 얼마나 견고하고 높은 어깨를 새로이 만들어 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물론 경제학이 사회과학인 만큼 경제학자가 공공정책을 포함한 사회 전체에 미친 영향도 어느 정도 고려한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경제학을 넘어서는 하이에크의 영향력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역 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중 정치나 사회에 대한 실질적인 영향 면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을 꼽는다면 하이에크(Hayek, Friedrich August von, 1899~1992)를 들어야 할 것이다. 우리 귀에도 익숙한 정치 지도자들이 그의 신념을 따르고 있다. 처칠, 대처, 레이건, 부시가 가장 대표적이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수상이 1970년대 후반 전당대회에서 당 노선에 대한 격론이 벌어졌을 때의 일이다. 대처는 자신의 가방에서 하이에크의 “자유헌정론”을 꺼내어 모두 볼 수 있도록 높이 들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바이다”라고 테이블을 힘차게 쳤다고 한다. 하이에크의 영향력은 경제학자와 정치가를 넘어선다. 미국의 경영 컨설턴트 톰 피터스나 피터 드러커는 하이에크를 이 세기에 있어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이자 사회철학자로 부르고 있다. 무엇이 하이에크를 이런 위치로 자리매김하게 했을까? 노벨상 선정위원회는 1974년 하이에크의 노벨상 수상 이유를 “화폐와 경기변동 이론에 대한 선도적 연구와 경제, 사회, 제도적 현상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깊은 분석”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가 노벨상 수상강연에서 밝혔듯이 하이에크가 제안하였고 그의 추종자들이 열렬히 추종했던 명제는 의외로 단순하다. “인간은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정원사가 정원을 가꾸듯이 성장을 일구어내는데 필요한 적절한 환경을 제공하는데 만족해야한다. 장인이 물건을 만들듯이 결과를 직접 다듬을 수 없다.” 즉, 제한된 지식을 가진 인간들로 모여진 인류가 진보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제한된 지식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하이에크의 知的 勇氣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이상의 하이에크의 명제는 현대의 눈으로 보면 너무나 단순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하이에크가 이러한 명제를 제안하고 이를 발전시켜나간 시기의 인류의 상황을 보면 하이에크의 지적 용기와 인내를 읽어낼 수 있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1944 년 ‘노예의 길’이 출판된 후 하이에크는 그의 도발적 주장으로 말미암아 국제적 인물로 부상한다. 그러나 하이에크 그 자신은 거의 학문적 사망선고를 받는 상황으로 몰리고 만다. 하이에크 스스로 “나의 주장이 지나치게 멀리 나아갔기 때문에 나는 전문가로서의 신망을 완전히 잃을 정도였다”라고 회고하였다. 그의 동료들은 이 책을 하이에크가 살고 있던 영국과 다른 유럽 국가들에 세워지고 있던 복지국가에 대한 위험스럽고 구시대적인 공격으로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책이 출간된 이후에도 20~30년간 이러한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1950~60년대 동안 구 소련 경제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고 정부의 덩치를 키워가던 유럽 각국들 역시 번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7년 에릭 홉스바움은 하이에크를 ‘광야의 예언자’라고 무시하였고 영국 철학자인 안토니 퀸톤은 그를 ‘위대한 공룡’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 그의 추종자였던 처칠은 이를 일찌감치 예견한 듯 했다. 1945년 하이에크의 책을 직접 거명하며 선거를 치르고 있던 윈스턴 처칠도 하이에크와 만난 자리에서 단 한마디만을 남겼다. “당신의 말은 전적으로 맞다; 그러나 영국에서 결코 그런 일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하 이에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이론을 더욱 다듬어갔다. 하지만 이어지는 저작 역시 많은 문제를 일으켰고 이는 경제학자로서의 신망도 잃게 만들었다. 어느 대학도 그를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결국 그는 영국을 떠나게 되었고 이후 미국의 몇몇 대학을 전전하다 마침내 1950년 시카고 대학에서 자리를 잡았다. 아쉽게도 그에게 자리를 준 곳은 경제학과가 아니었다. 밀턴 프리드만의 말을 빌리자면 “당시로서는 하이에크가 실제로 어떤 경제학도 하지 않고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노벨상에는 능력과 용기가 필요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어 려움이 극해 달하고 있을 때 노벨상이 의외로 찾아왔다. 당시 스웨덴 과학 아카데미는 정부개입주의자이자 스웨덴식 사회주의의 주창자인 군나르 미르달에게 상을 수여하려 했지만 편향된 선택임을 불식하기 위해 보수주의자로서 하이에크를 공동 수상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하이에크를 포함한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볼 때 하이에크의 노벨상 수상은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서막이었다. 경제학계나 정치 사회 환경은 70년대 중반부터 빠르게 바뀌어 갔다. 1974년 오일쇼크 이후 유럽 각국은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고 무비판적 정부 개입은 스태그플레이션을 낳았다. 경제학자들은 정부개입의 한계와 시장의 중요성을 재발견하였다. 레이건과 대처와 같은 자유세계의 정치지도자, 그리고 동부유럽, 구소련 그리고 중국 등의 반체제 인사들 역시 하이에크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하이에크가 일찍부터 예견했던 소련의 붕괴가 이어졌다. 밀턴 프리드먼은 “내 생각으로 이 사이클에서 아담 스미스의 역할을 한 것은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이다”라고 하이에크와 서구 사회가 걸어갔던 길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하 이에크의 생애는 사회과학자와 노벨상 수상자가 걸어가는 길을 너무나도 잘 보여준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이론은 찬사보다는 적지 않은 시련을 요구한다. 그렇지만 하이에크의 지적대로 새로운 것이 유용함을 입증할 임무는 그것을 주창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지 기존 사회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에게는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능력뿐만 아니라 그것을 오랜 세월동안 가꾸고 지켜갈 수 있는 지적 용기가 요구된다. 이념적 편향과 상관없이 하이에크는 두 가지 모두를 갖춘 노벨상 수상자였다고 하겠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인간존중 5호 특집 '노벨상 가까이 다가서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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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박성숙
- 작성일200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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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시 카고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박사후(Postdoc)과정을 위해 머물었던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은 노벨상이 주어지는 10월이 오면 학교가 술렁대기 시작한다. 2005년 노벨화학상 수상자 3인중 한 명인 로보트그럽스 교수를 포함하여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출신의 노벨상 수상자가 31명에 이르니, 해마다 이 대학 교수 중 누가 상을 받을 것인가는 큰 관심거리다. 내가 일했던 연구실의 보스이었으며 1992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였던 마커스 교수의 경우에도 ‘올해는 주어질 텐데, 안 주어지면 내년에는 주어지겠지’ 하면서 관심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이방인이었던 나조차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 머무르는 동안은 노벨상 수상자 발표 시기 때만 되면 덩달아 흥분되면서 묘한 기분에 싸였었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노 벨화학상의 시작은 화학의 정통 분야인 유기화학이 아니고 물리화학 분야에 주어졌다. 즉 노벨화학상은 물리화학이라는 신학문의 태동과 때를 같이 했고, 그 이후 노벨화학상 수상자들의 면면이 바로 화학분야의 발전사와 그 궤를 같이 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TEXT-DECORATION: underline">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눈에 보이지 않는 분자의 구조, 천재적인 방법으로 파악하는 화학자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화학자들은 비이커에 시약들을 섞고 끓이지만, 이들이 실제로 하는 일은 개개의 분자를 쪼개어 이리저리 붙여 새로운 분자를 만드는 것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자의 구조를<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TEXT-DECORATION: underline"> <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여 러 천재적인 방법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광학의 발전은 분자하나를 직접 관찰하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분광학분야의 불후의 명저들을 남기고 그로인해 노벨상을 받은 헤르츠버그 외 분광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또 다른 과학자로 멀리켄이 있다. 그는 분광학 실험을 설명하기 위해 분자궤도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고 그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혹자는 아이디어 하나로 노벨상을 탔다고 콜럼버스의 달걀에 비유하며 그의 업적을 비하하기도 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감히 그런 식으로 이야기할 수가 없다. 초창기 분자분광학이라는 분야 발전에 끼친 그의 영향력은 엄청났고 그런 토대 위에서 분자궤도 개념은 탄생을 했던 것이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시카고 대학은 분자궤도함수론의 메카가 되어 수많은 젊은 과학자들이 꿈을 안고 모여들었던 것이다. 20세기 초 발전한 양자역학은 화학자들로 하여금 분자의 성질을 계산할 수 있도록 하였고 멀리켄의 반정량적인 아이디어는 한편으로는 분자 반응에 적용이 되어 후쿠이와 호프만의 노벨상 수상을 가져오고 다른 한편으로는 계산화학이라는 학문으로 발전을 하게 되어 콘과 파플의 수상을 가져왔다. 분광학은 더욱 발전하여 1999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즈웨일 등에 의해 발전된 펨토초 분광학은 분자 내에서 실시간으로 에너지, 전자, 원자들의 운동을 볼 수 있게 하고, 2002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다나카, 뷔트리크 등에 의해 거대분자들의 분자량과 구조들을 쉽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노벨화학상은 물리가 화학에 끼친 영향과 그로 인한 화학의 거대한 발전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놀라운 통찰력과 겸손함 그리고 조국을 잊지 않은 유안 리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노 벨화학상을 수상한 과학자 중 1986년 분자살 충돌실험으로 수상자가 된 유안 리를 통해 인류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는 위대한 과학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을 느낀 바 있다. 대만 토박이였던 유안 리는 버클리 대학에서 대만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미국에서는 나 한 사람 더 있고 없고가 큰 차이가 없으나 대만에서는 매우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나의 연구생활이 희생되더라도 대만으로 가겠다”고 자신의 대만행을 설명했다. 그로 인해 지금은 분자충돌실험 분야에 있어 대만이 메카가 되어, 전 세계에서 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필히 한 번 가야하는 곳으로 되어 있다. 타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이었던 탓도 있었겠지만 그의 겸손함과 애국심(?)은 나에게는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내 지도교수였던 파노 교수는 유안 리를 너무 좋아해, 때때로 그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부인이 시카고는 너무 추워 대만으로 가자고 졸라 절충으로 버클리 대학으로 옮긴 일, ‘실험분야에서의 모차르트’로 불리던 그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어떤 실험도 설계를 할 수 있다, 그런 그도 헬륨 간 충돌에서 양자 간섭현상을 볼 수 있는 실험을 할 수 없냐고 하니 현재론 불가능하다고 한 일, 그의 학생들의 학위논문을 도서관에서 우연히 볼 기회가 있었는데 지도교수인 그의 놀라운 통찰력에 경의감을 감출 수 없었다, 등등. 」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평생을 받쳐도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연구해야 한다던 폴링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노 벨상을 받은 화학자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꼽히는 폴링의 일화도 과학도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가 화학분야에 기여한 업적은 그가 서거한 해, 미국화학회에서는 평상시 폴링이 주장하던 ‘일생을 바쳐 연구할만한 성배(holy grail)’에 해당하는 화학연구들에 대해 1년간 ‘Accounts of Chemical Research’에 연재한 것만으로도 족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 폴링 교수는 대학원생들에게 “깊은 산속에서 가로, 세로, 높이가 30 cm인 금덩이를 발견했을 때 당신 같으면 그 금덩이를 버리고 가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길 좋아했다. 문제는 금덩이의 무게가 무려 700 kg이 넘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그의 답변은 이러했다. “아마 여러분 같으면 버리지 않고 어떻게든 가지고 가려고 할 것이다. 연구도 마찬가지다. 훌륭한 연구는 평생을 받쳐 하기엔 불가능할지 모르더라도 대학원생들은 이런 연구를 해야 한다.” 대학원생들은 큰 꿈을 가져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많은 학생들을 감동시켜 훌륭한 화학자를 배출시킨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위대한 업적만큼이나 따뜻했던 마커스와 파노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앞 에서 적은 1992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이며 한 때 나의 보스였던 마커스 교수에 대한 추억은 위대한 과학자의 체취로 나에게 소중이 남아있다. 개인적으로 판단하건데, 한 세기에 한 명 정도 나올 최고의 이론화학자인 마커스 교수는 이론과 실험의 큰 괴리감을 갈파하곤 했다. “아무리 어려운 것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화학자들은 실험값과 크기를 비슷하게 계산할 수만 있으면 샴페인을 터트린다” 이 말은 이론 화학자로서 훌륭한 업적을 쌓고 있는 마커스 교수이기에 할 수 있는 그 다운 말로, 이를 떠올릴 때면 그와 나와의 크나큰 차이를 느끼며 몸서리가 쳐지곤 했다. 학문적으로 높은 경지에 있던 마커스 교수는 마음이 무척 좋았다. 하지만 간혹 자신도 모르게 학생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상처를 받은 학생은 그의 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 았고, 그의 부인은 마커스 교수를 대신하여 학생을 위로해주는 뒤치다꺼리 했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나 의 지도교수인 파노 교수도 Fano effect, Beutler-Fano profile, Fano-Lichten diagram, Lu-Fano plot, Fano factor 등 그의 이름이 들어 있는 정리가 매우 많은 훌륭한 과학자였다. 한국에 귀국하여 파노 교수에게 편지를 쓰니 반갑게 답장하면서, 일본인 선배를 거론하며 일본도 연구풍토가 자리 잡히지 않아 어려움이 많다고 걱정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런 연구풍토에 대해 간혹 이야기를 한다. “연구생활은 단순한 생활이다. 아침에 연구소에 들어서면 누군가 벌써 끓여 놓은 커피의 진한 향이 뇌를 자극한다. 어디선가 열띤 연구이야기가 들리고 연구에 지친 입에서는 냄새가 풀풀 난다.” 그 때는 그런 입 냄새가 정말 싫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입 냄새가 정말 그립다. 누군가 다가와 묻는다면 금상첨화다. What's new?라고. <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rgb(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한컴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컴바탕'; TEXT-ALIGN: justify"> 아주대학교 종합정보지 '인간존중' 5호 <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컴바탕'; TEXT-ALIGN: justify">특집 '노벨상 가까이 다가서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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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박성숙
- 작성일200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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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스나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화제이면서도 그 내용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지난해 말 논란이 되었던 줄기세포나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노벨상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을 보면 최근 문제를 일으킨 우리나라 배아줄기세포 연구자가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도록 정치인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였다고 한다. 만약 추진위원회를 만든 사람들이 노벨상과 줄기세포 연구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면 이런 해프닝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부터 노벨과 노벨상, 노벨상의 의미에 대해 좀 더 알아보도록 하자. 20여개국 94개사 거느린 최초의 다국적 기업의 총수 알프레드 노벨 노 벨에 의해 노벨상이 만들어졌다는 것,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제외하고 노벨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1896년 노벨이 사망하고 1901년 최초로 노벨상이 수여되기까지의 우여곡절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노 벨은 1833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당시 스웨덴은 지금의 노르웨이를 지배하고 있던 북구의 강대국이었다 - 이 때문에 노벨상 중 평화상만은 지금도 노르웨이에서 수여하고 있다. 노벨 가문은 많은 유명한 기술자를 배출한 가문이었고 노벨의 아버지 역시 기술자였다. 러시아에 이주하여 무기를 생산하여 부자가 된 아버지의 덕택으로 노벨은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노벨을 학교에 보내는 대신 우수한 가정교사로 고용하여 노벨에게 과학, 언어, 예술, 철학 등 수준 높은 가정교육을 시켰다. 이 덕분에 노벨은 스웨덴어 이외에 5개 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게 되었다. 또 1850년에는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에 머물며 화학교수 펄루즈로부터 1년간 화학을 배우게 되었는데 이때 운명적인 니트로글리세린이라는 액체폭약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니트로글리세린은 매우 불안정하여 조금만 충격을 받아도 폭발하기 때문에 당시 아무도 이를 사용하려 하지 않았다. 1850 년 러시아가 크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아버지의 무기 공장이 파산을 하게 되었다. 이에 아버지 대신 노벨의 세 형제가 회사를 일으키기 위해 니트로글리세린을 이용한 안전한 폭약의 개발에 나서게 되었다. 우선 니트로글리세린을 대량생산하는 방법을 발견하였고 많은 실험을 거쳐 니트로글리세린과 폭발력이 약한 기존의 흑색화학을 섞은 후 뇌관을 달아 터뜨리면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 폭약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아냈다. 발명에 대한 특허권도 얻고 폭약을 만들어 돈을 벌게 된 노벨은 스웨덴으로 돌아가 폭약공장을 차렸다. 이후 사업가로서의 기질을 발휘하여 스웨덴뿐만 아니라 독일, 미국 등에도 공장을 세워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866년 독일 공장에서 일어난 폭발 사고를 계기로 더 안전한 폭약을 개발하려고 노력하던 중 니트로글리세린을 규조토에 섞은 후 뇌관을 단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게 되었다. 다이너마이트는 이전 폭약보다 폭발력은 약하지만 매우 안전하였다. 또한 당시 전 세계적으로 철도, 도로, 터널, 다리 건설이 늘어나면서 다이너마이트에 대한 수요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어 노벨의 부는 천문학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80년대 후반 노벨은 총 20여 개국에 94개의 회사를 가진 세계 최초의 다국적 기업의 총수가 되었다. 노 벨은 평생 독신으로 지내다 죽었다. 그는 사람들과의 교제를 싫어했으며 여가시간은 독일,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 있는 자신의 저택을 오가며 저택에 마련한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거나 독서를 하며 보냈으며 시나 소설을 쓰기도 했다. 만년에는 바쁜 사업일정, 유명인에 대한 호기심, 폭약 발명에 대한 세상의 따가운 시선 등으로 정신적 고통을 받았고 1895년 협심증 증세가 악화되자 노벨상 제정의 뜻을 담은 마지막 유언장을 작성해 스웨덴의 은행에 보관했다. 1896년 12월 10일 노벨은 이탈리아 산레모 저택에서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노벨의 최종 유언장의 노벨상 관련 부분) 나의 전 재산을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처리할 것을 밝혀둔다. 원 금은 나의 집행인들에게 맡겨 안전한 곳에 투자해 기금을 조성하게 하고, 기금에서 나오는 이자는 지난해 인류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을 선정해 상을 주는 형태로 매년 지급하도록 한다. 앞서 언급한 이자는 5개 부문에서 공헌한 사람들에게 골고루 분배하도록 한다. 첫째, 물리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 둘째 화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 셋째 생리학이나 의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 넷째 문학 분야에서 가장 탁월한 이상주의적인 경향의 작품을 쓴 사람, 다섯째 국가간 우애를 돈독히 하거나 군대를 폐지 또는 축소시키거나 평화회담을 주창 또는 개최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상을 주도록 한다. 물 리학상과 화학상은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에서 수여하도록 한다. 생리의학상은 스웨덴 스톡홀름의 카롤린스카 의학연구소에서 수여하도록 한다. 문학상은 스웨덴 아카데미에서 수여하도록 한다. 평화상은 노르웨이 의회에서 선출된 5인위원회에서 수여하도록 한다. 상을 수여하는데 있어 어떠한 경우에도 후보자의 국적이 고려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따라서 상은 스칸디나비아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수상할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 수여되어야 한다. 노벨의 유언에 따라 2000억원 기부로 노벨상 제정 노 벨이 사망한 후 노벨의 최종 유언장이 공개되자 그의 친척과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노벨의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을 것으로 기대했던 친척들은 대부분의 재산을 ‘지난 해 인류에게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에게 상을 수여하도록 기부한다’라고 적힌 유언장의 내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노벨이 기증한 재산은 지금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여 2000억 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친척은 자신들의 몫이 거의 없기 때문에, 스웨덴 정부는 상금이 외국인에게 지급된다는 사실 때문에 노벨의 유언에 불만이었고 소송이 잇달았지만 모든 소란이 가라앉은 1901년 12월 10일(노벨 사망일) 노벨이 소망한대로 최초의 국제적인 상인 제1회 노벨상이 수여되었다. 노 벨의 유언대로 처음에는 문학상, 평화상,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의 5개의 상이 수여되었고 1969년 스웨덴 국립은행 창립 300주년을 기념하여 경제학상이 신설되어 현재 모두 6개의 노벨상이 수여되고 있다. 각 상은 유언에 따라 각기 다른 기관의 노벨위원회에서 수상자를 선정하며 기금 및 시상식 관리 등은 노벨재단이 전담한다. 노 벨상 수상과 관련하여 우리가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이 바로 노벨상 수상자의 엄정한 선정과정이다. 우선 매해 9월부터 다음 해 수상자의 추천을 시작한다. 보통 3000명 이상의 저명 학자(이전 노벨상 수상자, 노벨상 수여기관의 회원, 전 세계 유명 대학 및 연구소의 교수, 학자나 연구원 등)에게 추천을 의뢰한다. 따라서 국제적인 인맥을 형성하지 못하면 후보자에 끼일 수조차 없다. 다음 해 1월 31일 후보자 추천이 완료되면 이때부터 노벨 위원회에서 추천 후보의 연구 업적, 중요성, 파급효과 등을 심사하게 된다. 이때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도움을 받는데 과학상의 경우 업적 자체도 중요하지만 업적의 파급효과와 학문에 미친 영향력을 매우 중요시한다. 연구 성과의 영향력이 낮다면 아무리 연구 성과가 좋아도 노벨상을 수상할 수가 없다. 각 노벨위원회에서는 심사를 완료해 9월 말까지 노벨상 수여기관에 보고하고 11월15일까지는 투표를 통하여 수상자를 결정해야 하며 결정이 끝나는 즉시 언론을 통해 발표를 한다. 노 벨상 시상 초기에는 주로 수상자가 한 명이었으나 차츰 수상자의 수가 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많아도 분야별로 3명을 넘지 않도록 규정되어 있다. 3명 이상이 거의 같은 시기에 비슷한 업적을 남겼을 경우 나이순으로 3명을 선택한다. 비록 서양이지만 연장자에게 기회를 우선 제공하는 점이 흥미롭다. 매년 12월 10일에 열리는 시상식에서 노벨상 수상자에게는 상장(개인별로 달리 디자인)과 메달, 상금이 수여된다. 상금은 현재 분야별로 15억 원 정도이며 3명인 경우 수상자의 업적에 따라 각각 1/3씩, 또는 한 사람은 1/2, 다른 두 사람은 1/4씩으로 배분한다. 국가간의 자존심 경쟁이 된 노벨상의 현대적 의의 이 제 100여년의 역사를 지닌 노벨상은 명실상부 세계 최고 권위를 가진 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또 노벨이 희망했던 대로 국적에 상관없이 과학, 문학, 세계 평화에 크게 기여한 사람들을 선발함으로써 학문 발전과 인류 복지의 증진에 기여한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노벨상 제정 초기에 노벨상은 노벨의 유언처럼 국가와는 관련이 없는 완전히 개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상의 권위가 커지면서 자국민이 그 해에 노벨상을 몇 개 수상했느냐를 놓고 국가 간의 자존심 경쟁이 치열해졌다. 마치 국가의 과학 수준이 노벨 과학상의 메달 수에 비례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노벨상을 탈 수 있는 분야를 국가가 지정하여 막대한 연구비, 인력을 지원하고 심사에 영향력을 미치려고 로비를 하는 등 부작용도 나타나기도 했다. 특히 옆 나라 일본에서는 2001년 정부 주도로 향후 50년간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 30명 배출이라는 야심찬 과학기술 기본계획을 확정하고 정부 예산을 집중 투자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행위이다. 구미의 선진국들이 과거 노벨 과학상을 독식하다시피 한 것은 과학문화가 정착되어 있고 과학을 전공하지 않지만 과학을 사랑하는 저변 인구가 많기 때문이지 결코 막대한 연구비의 지원이나 로비에 의한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한 두 사람의 스타가 바람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바람이 지속되어 결과를 얻기까지는 여러 사람들의 동참과 오랜 동안 과학을 가꾸는 정성이 필요하다. 자기 분야에 열정을 가지고 노벨의 유언대로 인류에 공헌할 업적을 얻기 위해 노력할 때 노벨상을 수상할 가능성이 커지며 그렇게 수상한 노벨상만이 노벨이 바라던 진정한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아주대학교 종합정보지 인간존중 5호 특집 \'노벨상, 가까이 다가서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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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박성숙
- 작성일200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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